2008년 04월 04일
번역 - 조지 오웰, "정치와 영어"(1946)

☆ 원문 : http://www.mtholyoke.edu/acad/intrel/orwell46.htm
☆ 사진 : www.george-orwell.org
George Orwell, "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 1946
조지 오웰, “정치와 영어,” 1946
이 문제에 조금이라도 신경이 쓰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가 형편없는 상태란 것을 인정할 테지만, 우리가 그에 대해 의식적 행위로 뭔가를 할 수는 없다는 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 문명은 퇴폐적이니, 우리의 언어는 - 이렇게 논의가 진행되는데 - 총체적 붕괴를 반드시 함께 겪어야 할 터다. 언어의 악용에 대한 어떠한 투쟁도 감상적인 무정부주의라는 주장이 뒤따른다. 이를테면 전깃불보다 양초들을, 택시 비슷한 이륜(二輪) 마차를 항공기보다 더 좋아하는 것 말이다. 이것의 기저에는 반(半)쯤 자각된 믿음이 자리하는데, 이는 언어가 자연적 성장물이지, 우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우리 스스로 모양을 내는 도구가 아니란 것이다.
현재, 언어의 쇠락에 궁극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원인이 있음은 명백하다. 이건 단순히 이 작가 혹은 저 작가의 나쁜 영향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효과는 원인이 될 수 있는데, 근본적 원인을 강화하고, 심화된 형태에서 같은 효과를 내고, 계속 그렇게 함으로써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실패하리라 생각하여 술을 마시러 갈 수 있고, 그가 술을 마심으로써 훨씬 더 완벽하게 실패할 수 있다. 이것은 영어에 벌어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생각이 어리석어서 못나고 부정확해지지만, (거꾸로) 우리 언어가 단정치 못한 게 바보 같은 생각을 갖게 하는 걸 더 쉽게 만든다. 요는 그 과정이 가역(可逆)적(reversible)이란 것이다. 현대 영어, 특히나 문어(文語)는 모방으로 확산되긴 해도, 필요한 어려움을 기꺼이 맞이하려 한다면야 피할 수 있는 나쁜 습관들로 가득 차 있다. 누군가 이 나쁜 습관들을 제거한다면, 누구든 더욱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명확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치적인 재생성(regeneration)에 필요한 첫걸음이다. 그러므로 나쁜 영어에 대한 싸움은 경솔한 것도 아니요, 전업 작가들만의 배타적인 걱정도 아니다. 나는 이 문제로 곧 돌아올 것인데, 나는 그 때 쯤엔 내가 여기에서 말한 게 더욱 명확해지길 희망한다. 한편, 여기 영어에서 현재 습관적으로 쓰이는 다섯 가지 표본이 있다.
이 다섯 문단들은 특별히 나빠서 뽑힌 게 아니라 - 내가 택하려고만 했다면 훨씬 더 나쁜 것을 인용했을 터인데 - 우리가 겪고 있는 심리적 잘못들의 다양함을 보여주기 때문에 뽑혔다. 그들은 평균을 약간 밑돌지만, 상당히 대표성 있는 사례들이다. 필요할 때 돌이켜 언급할 수 있도록 그들에 번호를 붙인다.
(1) 나는 매년 훨씬 더 괴로운 경험으로부터, 17세기의 셸리(Shalley)와 닮아 보이지 않던 밀튼(Milton)이 그를 참을 수 있게 할 무엇도 없던 예수회 종파의 그 창시자에 더욱 반대하게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사실이 아닌지 혹은 그러한지를 실로 확신할 수 없다. (원문 그대로) - 해롤드 라스키 교수 ([표현의 자유] 중의 에세이)
(2) 무엇보다도, 우리의 근본(Basic)이 관대하게 대하려 참아 내거나, 혼란스러워 어찌해야 할지 모를 터이기에, 터무니없는 배치들을 규정하는 여러 고유 단어들의 숙어들로 (물수제비뜨기)장난을 할 수는 없습니다. - 랜슬롯 호그벤 교수 ([설간(舌間)] - Interglossa)
(3) 한편으로 우리는 자유 인격을 갖고 있습니다. 정의상으론 신경의학적인 것은 아니죠. 왜냐하면 그게 대립하지도 꿈꾸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렇듯, 그것의 바람들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의식의 전면(前面)에 제도적 승인이 보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다른 제도적 패턴은 그들의 수와 집중도를 변화시킬 겁니다. 그들 중엔 자연적이라거나, 줄일 수 없다거나, 혹은 문화적으로 위험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반면엔, 사회적 유대 그 자체는 이러한 ‘자기 보호’상 총체들의 상호 반영일 뿐입니다. 사랑의 정의를 기억해보세요. 바로 작은 학문의 모습 아닙니까? 이 거울의 방에 인격이나 박애를 위한 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정치학에서의 심리학에 대한 에세이 (뉴욕))
(4) 신사들의 클럽들에서 “최고인 사람들” 모두가, 그리고 모든 광신적인 파시스트 지도자들 모두가 사회주의, 그리고 대중의 혁명적 운동의 떠오르는 파도에 대한 극도의 공포에 대항해 공동의 증오로 뭉쳤는데, 그들은 악랄한 선동 행위, 중세의 독을 풀어 넣은 우물 같은 도발 행위로 전환했다. 그들 자신이 프롤레타리아 조직을 붕괴시킨 걸 정당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위기의 와중에 혁명적 방식에 대항한 투쟁 대신에 선동된 쁘띠 부르주아들을 쇼비니즘적인 열정으로 선동하고 있다. (공산주의자 팜플렛)
(5) 새로운 정신이 이 오래된 나라에 녹아들려면, 다뤄져야할 골치 아픈 데다, 논쟁적일 하나의 개혁이 있는데, 그것은 BBC를 인간답게 만들고 활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곳의 소심함은 영혼의 궤양과 쇠퇴의 증거다. 가령, 브리튼의 심장은 건강하고 강하게 뛰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브리튼의 사자의 포효는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중 ‘바텀’의 것과 같다. 모이를 쪼는 비둘기마냥 조용하단 말이다. 남성스러운 새 브리튼은 뻔뻔스럽게도 “표준 영어”라 가면을 쓴 랭함 광장(Langham Place)의 무력한 권태에 의해 세상의 눈이나 심지어는 귀에 무한히 계속 왜곡될 수는 없다. 아홉 시에 [영국의 소리]를 들을 땐, 탓할 바 없지만, 숫기 없고, 야옹야옹 거리는 아가씨들의 까다롭고, 자만에 차있고, 내성적이고, 학교 여선생님 같은 커다란 소리보다는, 솔직히 ‘에이치(H)'들이 빠진 걸 듣는 게 더욱 덜 우스꽝스럽다. (트리뷴지(紙)의 (독자) 편지)
이 각 부분들이 그 나름의 결함을 갖고 있지만, 피할 수 있는 못난 점에 대해선 꽤나 분리되어 있음에도, 두 가지 속성이 그들 모두에 공통적이다. 첫째는 상상의 진부함이요, 다른 것은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필자가 주제의식은 있는데 그걸 표현치 못하거나, 뭔가 다른 걸 무심코 말한다거나, 그의 말들이 뭘 의미하는지, 의미하지 않는지에 대해 거의 무신경하다는 말이다. 모호함의 혼합과 단순히 무능함은 현대 영어 산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리고 특히나 정치적인 글에서 그러하다. 어떤 주제가 제기되자마자, 구체성이 모호함으로 녹아버리고, 누구도 연설의 진부하지 않은 문체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산문들은 그들의 의미상으로 선택된 단어들로는 점점 덜 구성되며, 미리 엮어진 닭장의 부분마냥 짜 맞춰진 어구들로 더욱 더 구성된다. 나는 산문 작성 작업을 종종 회피하게 하는 속임수들의 다양함을 아래에 주석들과 사례들을 덧달아 제시하겠다.
죽어가는 메타포(은유법) 최근에 개발된 메타포는 시각적 이미지를 자아내어 생각을 돕는다. 반면에 기술적으로 죽어버린 메타포(예를 들어 '강철같은 결의'-iron resolution)는 실제론 일반어가 되는 걸로 돌아갔으며, 일반적으론 생기(生氣-vividness)를 잃지 않고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종류 사이에는 닳아빠진 메타포의 엄청난 쓰레기가 있는데 이들은 뭔가를 불러일으키는 힘을 모두 잃었으며, 단지 사람들이 스스로 어구들을 만들어내야 하는 곤란으로부터 구해주기 때문에 쓰일 뿐이다. 예를 들면, ‘ring the changes on(종을 쳐 변화를 알리다→방법을 바꿔가며 하다)’, ‘take the cudgel for(누구를 위해 곤봉을 들다→강력히 변호하다)’, ‘toe the line(선에 발끝을 대다→정렬하다)’, ‘ride roughshod over(누구의 위로 편자를 박아 넣은 말을 달리다→함부로 굴다)’, ‘stand shoulder to shoulder with(어깨를 붙여 서다→나란히 서다)’, ‘play into the hands of(누구의 손아귀에서 놀다→누구의 이익이 되도록 행동하다)’, ‘no axe to grind(갈아야 할 도끼가 없다→?사심이 없다)’, ‘grist to the mill(방앗간에 갈 곡식→이익이 되다)’, ‘fishing in the troubled water(풍랑 속에 낚시하기→혼란을 틈타 한 몫 보다)’, ‘On the order of the day(그날의 순서에 따라→요새 풍조에 따라)’, ‘Achilles' Heel(아킬레스건→치명적 약점)’, ‘Swan song(백조의 노래→최후의 작품-절창(絶唱))’, ‘hotbed(후끈 달아오른 곳→온상-소굴)’ 이 많은 것들이 그들의 의미에 대한 지식 없이 쓰이며, (예를 들어 균열(불화의 의미로 쓰이는 rift)이 뭔가?) 모순된 메타포들이 자주 섞이는데, 이는 작자가 그가 말하는 바에 대해 흥미가 없다는 분명한 신호다. 몇몇 현재 통용되는 메타포들은 그들의 원래 의미에서 꼬여져 버렸다. 심지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쓰는 사람들 없이 말이다. 예를 들어 'toe the line(선에 발끝을 대다, 정렬하다)'는 종종 'taw the line(선을 치다)'으로 쓰인다. 다른 예는 ‘the hammer and the anvil(망치와 모루)’인데, 현재는 항상 ‘모루가 최악을 맞다’는 의미로 쓰인다. 실생활에선 망치를 부러뜨리는 건 항상 모루며, 절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즉 말하고 있던 바에 대해 생각하려고 잠시 멈춘 작가는 원래 어구의 오용을 피할 터다.
행동요소(operator) 혹은 동사상의 잘못된 부분들 이것들은 적절한 동사와 명사들을 선택하는 수고를 덜어주며, 동시에 각 문장들에 대칭의 모양을 내는 추가 음절을 덧대준다. 특징적인 어구들은 render inoperative(렌더 인오퍼러티브, 작동되지 않게 하다), militate against(밀리테이트 어게인스트, 무엇에 불리하게 작용하다), be subjected to(비 서브젝티브 투, 무엇에 달려있다), give rise to(기브 라이즈 투, 무엇을 일으키다), give grounds for(기브 그라운즈 포, 무엇에 굴복하다), have the effect of(헤브 디 이펙트 오브, 어떤 효과가 있다), play a leading part(role) in(플레이 어 리딩 파트, 주도적 역할을 하다), make itself felt(메이크 잇셀프 펠트, 남이 알아채게 하다), take effect(테이크 이펙트, 효과가 나타나다), exhibit a tendency to(이그지빗 어 텐던시 투, 어떠한 경향을 보이다), serve the purpose of(서브 더 퍼포즈 오브, 무엇에 도움이 되다), 기타 등등(etc.) 따위다. 요는 단순한 동사들의 제거다. break(깨다), stop(멈추다), spoil(망치다), mend(고치다), kill(죽이다) 같은 한(one) 단어가 되는 대신, 동사는 prove(증명하다), serve(역할을 하다), form(형성하다), play(역할을 하다), render(어떠하게 만들다 혹은 무엇을 주다)같은 몇몇 범용(汎用, general-purpose)동사 에 결합된 명사나 형용사로 이뤄진 구(句)가 된다. 게다가 능동태 보다 수동태가 가능한 곳이면 어디에나 쓰이며, 명사 구문이 동명사 대신에 쓰인다. (by examining(무엇을 관찰하여)대신 무엇의 관찰에 따르면(by the examination of)) 동사들의 범위는 ‘~ize(화(化))’와 ‘de~(반(反), 탈(脫))’구조들에 의해 더욱 줄어들며, 진부한 발언들은 ‘not un~(아닌 게 아니다-이중부정)’으로 심오한 인상(appearance)을 얻는다. 간단한 접속사와 전치사들은 with respect to(무엇의 관점에서), having regard to(무엇을 고려하여), the fact that(무엇이란 사실), by dint of(무엇에 의하여), in view of(무엇의 관점에서), in the interest of(무엇의 이익상), on the hypothesis that(무엇이란 가정 상) 같은 구들로 대체된다. 그리고 문장들의 끝들은 ‘greatly to be desired(바라마지 않는다)’ ‘can not be left out of account(이해되지 아니해서는 안된다)’, ‘a development to be expected in the near future(근 시일에 발전이 기대된다)’, ‘deserving of serious consideration(깊은 관심을 받을 법 하다)’, 'brought to a satisfactory conclusion(만족할만한 결론에 이르렀다)‘ 등등 같은 진부한 말들의 반복으로 구원받는다.
허세부리는 말. phenomenon(현상), element(요소), individual(명사로 쓰인 개인), objective(목적), categorical(범주상의), effective(효과적인) virtual(가상의, 실질적인), basic(기본적인), primary(주된), promote(진흥시키다), constitute(구성하다), exhibit(전시하다, 보여주다), exploit(착취하다), utilize(이용하다), eliminate(제거하다), liquidate(변제하다, 유동화하다) 같은 단어들이 간단한 말을 치장하는데 쓰이며, 치우친 판단에 과학적 공정함의 분위기를 제공한다. epoch-making(시대를 여는, 획기적인), epic(서사시적인), historic(역사적인), unforgettable(잊을 수 없는), triumphant(승리의), age-old(오래된), inevitable(피치 못할), inexorable(벗어날 수 없는), veritable(진실된) 같은 형용사들이 국제정치의 탐욕스러운 과정을 고결하게 한다. 한편 전쟁을 영광스럽게 만들려 하는 저작들이 주로 옛스러운 색채를 띠는데, 그 특질적인 단어들은 realm(장엄함), throne(권좌, 권력), chariot(전차(戰車)), mailed fist(철갑을 두른 주먹-무력행사), trident(삼지창), sword(검), shield(방패), buckler(둥글고 작은 방패), banner(깃발), jackboot(군홧발-강압행위), clarion(전장의 나팔)이다. cul de sac(퀼드삭, 막다른 길), ancien regime(앙시엥 레짐, 구체제), deus ex machina(데우스 엑스 마키나, 신이 등장하여 난관을 해결해주는 플롯, 판에 박은 해피엔딩), mutatis mutandis(무타티스 무탄디스, 개개의 차이를 고려하여), status quo(스테이터스 쿠오, 현상유지), gleichschaltung(글라이크샬퉁, 정치적 문화적 통제-획일화), weltanschauung(벨탄샤웅, 세계관)같은 외래어와 외래 표현들은 문화적이고, 우아한 느낌을 준다. 유용한 축약어들, i.e.(id est, 다시 말해서), e.g.(exempli gratia, 예를 들어), 그리고 etc.(et cetera, 기타등등)을 제외하곤, 영어에 지금 통용되는 수백여 개의 외래 어구는 진정한 필요가 없다. 형편없는 작가들과 특히 과학적, 정치적, 그리고 사회학적 작가들이 거의 항상 라틴어나 그리스어가 색슨어(영어)보다 기품 있다는 관념에 의해 망령에 사로잡혀있다(haunted). 그리고 expedite(엑스퍼다이트, 촉진시키다), ameliorate(아멜리오레이트, 개선하다, 낫게 하다), predict(프리딕트, 예측-예언하다), extraneous(익스트레이니어스, 외래의, 비본질적인), deracinated(디레서네이티드, 근절된), clandestine(클랜데스틴, 은밀한, 비밀의), subaqueous(서베이퀴어스, 수중의) 그리고 다른 수백 개들이 계속해서 그들의 앵글로-색슨 집단으로부터 입지를 얻고 있다.(♤) 마르크시스트 글쓰기에 독특한 은어(hyena(하이에나), hangman(교수형 집행인), cannibal(식인종), petty bourgeois(쁘띠 브루주아, 소시민), these gentry(이런 패거리들), lackey(아첨꾼, 추종자), flunkey(아첨꾼, 종복), mad dog(미친개), White Guard(백군(白軍)) 등등)는 크게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에서 번역된 단어들로 구성되지만,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는 일반적인 방법은 라틴어 혹은 그리스어 어근(語根)에 적절한 접어(接語)를 붙이고, 필요한 곳에선 구성을 조정하는 것이다. 작자가 의도하는 바를 커버해 줄 영단어를 생각해 내는 것보다 이런 부류의 단어(deregionalize-반(反)분권화, impermissible-허가할 수 없는, extramartial-불륜의, non-fragmentary-반(反)단편적인, 등등)를 만드는 것이 종종 더 쉽다. 일반적으로 그 결과는 칠칠치 못함과 모호함이 늘어나는 것이다.
(♤ 이것의 흥미로운 실례는 최근까지 통용되던 영국 꽃 이름들이 그리스 이름들에 내몰린 양상인데, Snapdragon(스냅드래곤, 금어초(金魚草))이 antirrhinum(앤티라니엄)으로, forget-me-not(포겟미낫, 물망초)이 myosotis(마이어소우티스)로 등등이다. 이러한 변화의 양상에는 어떤 실용적인 이유도 찾기 어렵다. 아마도 흔한 단어로부터의 본능적인 거부와 그리스 단어가 과학적이라는 모호한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의미 없는 말들 어떤 부류의 글쓰기에선, 특히나 예술비평과 문학 비평에서, 거의 전적으로 의미가 없는 긴 부분을 접하는 게 보통이다.(♡) (예를 들어) 예술비평에서 쓰이듯 romantic(낭만적인), plastic(감수성이 강한), values(가치 있는), human(인간적인), dead(죽은), sentimental(감상적인), natural(자연스러운), vitality(생명력, 생기 있는 정도) 같은 단어들은 발견할 수 있을만한 대상 어느 것도 가리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그렇게 하도록 거의 기대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엄밀히 의미가 없다.
(♡) 사례 : 그 범위에 있어 이상하리만치 ‘휘트먼’같고, 미학적 강박의 거의 정확한 대척점인, 지각과 이미지의 ‘위로의 보편성’은 전율스러운 분위기가 쌓여가는 힌트를 잔인하고도, 피할 수 없는 잔잔한 영원에서 계속해서 불러일으킨다. 레이 가디너(Wrey Gardiner)는 정확하게 단순한 핵심을 겨냥함으로써 성공했다. 그것들이 너무나 단순한건 아니며, 이 기꺼운 슬픔을 통하여 단념의 달콤씁쓸함, 그 겉핥기 이상이 진행된다. ([계간 시론(Poetry Quarterly)]
어떤 비평가가 “X씨의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 살아있음이다.”라고 쓰고, 반면 다른 작가가 쓰길 “X씨의 저작에 대해 즉각적으로 놀라운 것은 그 독특한 죽어있음이다.”라면 독자는 이걸 단순한 의견의 다름으로 받아들인다. 살아있음이나 죽어있음 같은 은어 대신에 ‘흑(黑)’과 ‘백(白)’같은 단어들이 연관되면 그는 말이 적절치 못한 방식으로 쓰였다고 즉시 알아차릴 것이다. 많은 정치적 단어들이 유사하게 오용되고 있다.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지금 “뭔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 한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자유’, ‘애국적인’, ‘현실적인’, ‘정의’란 단어들은 그들 각각 여러 다른 의미들을 갖는데, 그것들은 서로 조화될 수가 없다. 민주주의라는 단어의 경우, 합의된 정의가 있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런 합의를 만들려는 시도는 모든 편으로부터 저항을 받고 있다. 우리가 어떤 나라를 민주적이라 말하면 우리가 그 나라를 칭찬한다는 게 거의 보편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모든 부류의 체제의 의 옹호자들은 자기네들의 것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어떤 한 의미로 묶여버리면 그들이 그 단어를 쓰는 걸 멈춰야 하게 되는 걸 두려워한다. 이런 부류의 단어들은 종종 의식적으로 부정직한 방법으로 쓰인다. 즉, 그러한 단어를 쓰는 사람이 그 나름의 개인적인 정의를 갖고 있지만, 그의 청자(聽者)로 하여금 그가 의도하는 바를 꽤나 다르게 생각하도록 한다. 페텡 원수는 진정한 애국자였다느니, 소비에트 언론이 세계에서 가장 자유롭다느니, 카톨릭 교회가 박해에 반대한다는 등의 발언들은 거의 항상 기만의 의도를 갖고 만들어진다. 대부분의 경우 다소 부정직하게,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다른 단어들은 class(계급), totalitarian(전체주의적인), science(과학), progressive(급진적인), reactionary(반동적인), bourgeois(부르주아), equality(평등)이 있다.
내가 이런 사기와 곡해들의 목록을 만들었으니, 그들이 이끄는 글쓰기 부류의 다른 사례를 제시하게 해 달라. 이번에는 그 본질상 상상 속의(imaginary) 것일 터다. 나는 좋은 영어의 어떤 문장을 가장 나쁜 현대 영어로 번역할 것이다. 여기 솔로몬 전도서(Ecclesiastes)의 잘 알려진 운문(韻文)이 있다.
“나는 돌아와 태양 아래에서 보았네. 경주는 날랜 자를 위함이 아니요, 싸움은 강한 자를 위함이 아니요, 하물며 빵이 현명한 이를 위함도 아니요, 부(富)가 현자를 위함도 아니요, 호의가 숙련된 이를 위함도 아니더라. 그러나 시간과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일어나더라.”
(I returned and saw under the sun, that the race is not to the swift, nor the battle to the strong, neither yet bread to the wise, nor yet riches to men of understanding, nor yet favour to men of skill; but time and chance happeneth to them all.)
현대 영어로 이뤄진 것은 이렇다.
“동시대의 현상에 대한 객관적인 고찰은, 경쟁적인 활동들의 성공 혹은 실패가 그 내재한 능력에 상응하는 경향을 보여주지는 않으나, 예측할 수 없음의 상당한 요소가 변함없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강요한다.”
(Objective considerations of contemporary phenomena compel the conclusion that success or failure in competitive activities exhibits no tendency to be commensurate with innate capacity, but that a considerable element of the unpredictable must invariably be taken into account.)
이건 패러디지만 아주 심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위에 있는 사례 (3)은 같은 부류 영어의 여러 누더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내가 완벽한 번역을 하지 않은 게 보일 것이다. 문장의 처음과 끝은 원래의 의미를 상당히 근접하게 따른다. 그러나 중간의 구체적 실례들(경주, 전투, 빵)은 모호한 구절인 “경쟁적인 활동들의 성공 혹은 실패”로 녹아들어간다. 내가 논하고 있는 부류의 현대 작가들 누구도 ("동시대의 현상에 대한 객관적인 고찰"같은 구절을 쓸 수 있는 그 누구도 아닌데)그의 생각을 정확하고 세세한 방식으로 표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해야 할 터였다. 현대 산문의 경향은 ‘구체적임’에서는 벗어나있다. 이제 이 두 문장들을 약간 세세하게 분석하라. 첫째는 마흔 아홉 단어를 담고 있지만, 단지 여섯 음절들뿐이며, 이 모든 단어들은 일상의 것들이다(영문). 두 번째는 아흔 음절들의 서른 다섯 단어들을, 그 중에 열 여덟 단어는 라틴어 어근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는 그리스어로부터 온 것이다. 첫 문장은 여섯 개의 생생한 이미지를, 모호하다 일컬어질 수 있는 단지 하나의 어구(“시간과 기회”)만을 담고 있다. 두 번째 문장은 생생한데다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어구는 하나도 없으며, 이 아흔 개의 음절들에도 불구, 첫째 문장에 담겨있던 의미의 줄어든 판(版, version)만을 제시할 뿐이다. 그러나 의심할 바 없이, 현대 영어에서 입지를 얻고 있는 것은 두 번째 문장 부류다. 과장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부류의 글쓰기는 아직 보편적이지는 않으며, 가장 나쁘게 쓰인 페이지들의 여기저기에서 어리석음의 노출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당신들이나 내가 인간 행운의 불확정성에 대해 몇 줄 글을 쓰란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아마도 솔로몬 전도서의 문장 보다는 내 상상의 문장에 훨씬 가까워질 것이다.
내가 보이려 노력했듯, 최악의 현대 글쓰기는 그 나름의 의미상으로 단어를 선택함으로써, 또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만들기 위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뤄지지 아니한다. 누군가에 의해 이미 정렬된 단어들의 문장(strip)을 방해하고, 단순한 허풍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방식의 글쓰기의 매력은 쉽다는 것이다. 그걸 말하기는 내가 생각하는 걸 말하는 것보다 더욱 쉬운데, 당신들이 습관을 갖기만 하면 훨씬 빨라진다. 내 생각엔 이는 정당화될 수 없는 가정이 아니다. 당신이 이미 만들어진 어구들을 이용한다면, 당신은 단어들을 사냥하지 않아도 되며, 당신 문장의 운율들을 고민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런 어구들이 일반적으로 다소 듣기 좋도록 배열됐기 때문이다. 당신이 서둘러 작문할 때, (가령 속기사에게 불러줄 때거나 혹은 연설문을 작성할 때) 겉치레 투, 라틴어화된 스타일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잘 유념해야 할 고려’나 ‘우리 모두가 기꺼이 동의할 결론’같은 상투어들은 충돌로부터 많은 문장들을 구해줄 것이다. 케케묵은 메타포나, 직유법이나 숙어들을 씀으로써, 당신은 정신적 수고를 꽤나 덜게 될 테지만, 그 대가로 당신의 의도를 모호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당신 독자들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도 말이다. 이야말로 뒤죽박죽이 된 메타포들의 중요성이다. 메타포의 유일한 목표는 눈에 보일 듯한 이미지를 불러내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이 충돌할 때 - ‘파시스트 옥토퍼스(바다 괴물)가 백조의 노래를 불렀다’, ‘군홧발이 용광로에 던져졌다’에서처럼 - 작가가 그가 지칭하는 대상의 정신적 이미지를 보지 않고 있음이 확실하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 다른 말로, 그는 정말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에세이의 서두에 제시한 예들을 다시 보라. 라스키 교수(1)는 50단어 속에 다섯 번의 부정(不正)을 쓴다. 이 중에 하나는 불필요한데다, 전체 문장을 말도 안되게 만든다. 게다가 - 익숙하기엔 이질적인-Alien for akin - 더욱 말이 안 되게 하는 실수가 있음에 더해, 전체적인 모호함을 더하는, 피할 수 있을 여러 서투른 부분들이 있다. 호그벤 교수(2)는 (알아볼 수 없기로 익히 알려진 의학 약품) 처방전을 쓸 수 있을만한 언어 배치로 (물수제비) 장난을 치는데, 감내하고 있다는 일상의 구문들을 인정치 않으면서도, 사전에서 ‘터무니없는(egregious)’을 찾아, 그게 뭘 의미하는지를 보려들지는 않는다. 무자비하게 굴려면야 (3)은 단순히 의미 없다(simply meaningless). 아마도 그게 있는 전체 논문을 읽음으로써 그 의도된 의미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4)에선 작자는 다소 그가 뭘 말하길 원하는지를 알고 있지만, 케케묵은 어구들의 적체(積滯, accumulation)는 싱크대를 막아버린 차(茶) 이파리처럼 그를 질식시킨다. (5)에선 단어와 의도에 연관이 거의 없다(parted company).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일반적인 감정적 의도를 갖고 있는데 - 그들은 무언가를 싫어하고, 다른 것과의 연대를 표현하길 원하지만 -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의 세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꼼꼼한 작가는 그가 쓰는 모든 문장에서 적어도 네 가지를 자문(自問)할 것이다. 즉 1. 내가 무얼 말하려 하는가?, 2.어떤 단어들이 그를 표현할 것인가? 3. 어떤 이미지나 숙어가 그것을 더욱 명확하게 만들어줄 것인가? 4. 이 이미지가 효과가 있을 만치 충분한가? 그리고 아마 두 가지를 더 물을 것이다. 1. 더 짧게 쓸 수 있을까? 2, 안 쓸 수 있을 만치 못난 걸 썼나? 그러나 당신은 이 모든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그냥 마음을 열어젖히고는 기성(旣成-이미 만들어진, ready-made)의 어구들이 판을 치게 내버려두어, 그걸 회피할 수 있다. 그것들이 당신을 위해 문장들을 구성할 텐데, 심지어 어느 정도까진 당신을 위해 당신 생각도 (대신에 생각)할 터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것들은 당신의 의도를 편향되게 덮어주는-심지어 당신 자신으로부터도 편향되게-중요한 봉사(service)도 할 것이다. 정치와 '언어의 타락(debasement)'간의 특별한 연계가 명백해지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우리 시대엔, 정치적 글쓰기가 나쁜 글쓰기라는 건 대개 사실이다. 그게 사실이 아닌 곳에선, 작자가 “집단의 노선(party line)"이 아니라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일종의 반란자(rebel)라는 게 일반적으로 발견된다. 어떤 색깔이든 간에 ‘정통(orthodoxy)’은 생기 없고, 모방적인 문체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팜플렛들, 사설들, 공약(메니페스토)들, 백서(白書)들, 그리고 차관의 연설들 같은 정치적 방언들은 물론 당별로 다양하지만, 그 안에서 신선하고, 생기 있고, 집에서 이루어지는 듯한 문체의 연설을 거의 절대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선 모두 유사하다. 누군가가 기계적으로 친숙한 어구들 - 짐승 같은 폭정(bestial atrocities), 강철의 뒤꿈치(iron heel), 피로 물든 독재(bloodstained tyranny), 세계의 자유인들(free peoples of the world), 어깨를 나란히 서다(stand shoulder to shoulder) - 을 반복하는, 연단에 선 다소 피로한 잡부(雜夫)를 바라볼 때, 사람들은 그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일종의 마네킨(dummy)을 보고 있다는 의아스러운 느낌을 갖는다. 그런 느낌은 갑자기 강해지는데, 조명이 그 화자의 모습을 잡은 뒤에, 그걸 뒤에 눈들(eyes)이 없을 것 같은 빈 레코드판들로 바꿔버릴 때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적으로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 말투를 쓰는 화자는 그를 기계로 바꿔버리는 편으로 어느 정도 가버린 것이다. 적절한 소음이 그의 성대(聲帶)에서 나오지만, 그의 두뇌는 '만약 그가 그의 단어들을 그 스스로 선택한다면 그래야 할 것'처럼 연관되지 않는다. 만약에 그가 하는 연설이 그가 계속해서 고쳐 말하도록(make up) 길들여진 것이라면, 그는 아마 거의 그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거의 의식을 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에서 무의식적으로 ‘아멘’이라고 말하는(응답을 발화하는)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런 의식(意識)이 줄어든 상황은 불가결한 게 아니면, 어느 정도 정치적 조화(political conformity)에 좋다.
우리 시대엔, 정치적 연설이나 글쓰기가 대개 옹호할 수 없는 것의 변호다. 인도에서의 영국 지배의 계속이나, 러시아의 숙청과 추방이나, 일본에의 핵폭탄 투하 같은 것들이 실로 변호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면하기엔 너무나 야만스럽고, 정당들이 내놓은 목표들에 들어맞지 않는 논의들에 의해서만 그러하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언어는 대개 완곡한 말로 이뤄져야 한다. 즉 논점 회피(question-begging)와, 순전히 불명확한 모호함 말이다. 무방비의 마을들이 공중에서 폭격당하고, 주민들이 들판으로 쫓겨나며, 가축들은 기관총으로 학살당하고, 가옥들은 소이탄으로 불붙는데, 이것이 평정(平定, Pacification)이라 불린다. 수백만의 농부들이 농장을 잃고, 그들이 짊어질 수 있는 것 만 갖고선 터덜터덜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이는 인구의 이동, 혹은 국경의 조정이라 불린다. 사람들이 재판 없이 수년간 투옥되거나 목 뒤에 총을 맞거나, 북극권 벌목 캠프에서 괴혈병으로 죽도록 보내지는데, 이게 ‘신뢰할 수 없는 분자들의 제거’라고 불린다. 만약 누군가 뭔가를, 그에 대한 관념적 묘사를 떠올림 없이, 지칭하길 원한다면, 그런 어투는 필요하다. 가령 러시아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어떤 마음편한 영국인 교수를 생각해보라. 그는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때, 당신의 적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아마도 그는 이런 걸 말할 테다.
“인류가 개탄할만한 어떤 특징을 소비에트 체제가 보여준다는 걸 자유롭게 인정하면서도, 내 생각엔, 정치적 반대에 대한 어떤 권리의 박탈이 전환기에 피치 못하게 수반된다는 점에, 그리고 러시아 인민들이 겪도록 요구된 가혹함은 구체적인 성과란 범위에서 충분히 정당화됐다는 점에 우리는 동의해야 합니다.”
부풀려 말하기, 그 자체는 일종의 완곡어법이다. 라틴어 단어들 다수가 마치 윤곽을 흐리게 하고, 모든 세부사항들을 덮어버리는 보드라운 눈(雪)마냥 진실에 내려앉는다. 명확한 언어의 가장 큰 적은 불성실이다. 누구든 실제 목표와 공표된 목표 간에 차이가 있을 때는, 마치 본능인 것처럼, 길다란 단어와 닳아빠진 숙어들에 의존한다. 잉크를 뿌려내는 오징어처럼 말이다. 우리 시대엔, “정치에서 물러서 있는다”같은 것은 없다. 모든 이슈들이 정치적인 이슈들이며, 정치 그 자체는 거짓말들, 회피들, 우둔함, 증오, 정신분열의 집합체다. 일반적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땐, 언어가 수난을 당해야 한다. 나는 독일어, 러시아어, 그리고 이탈리아어가 - 이건 증명하기엔 내가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추측인데 - 지난 10년 혹은 15년간 독재의 결과로 모두 악화되었다고 알게 되길 희망한다.
그러나 생각이 언어를 오염시킨다면, 언어 또한 생각을 오염시킬 수 있다. 나쁜 용례가 전통과 모방으로 퍼질 수 있는데, 심지어 더 잘 알아야 하고, 더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러하다. 내가 논해온 타락한 언어들은 어떤 식으론 매우 편리하다. “정당화할 수 없는 가정이 아닌(not unjustifiable assumption)”, “바랄 바를 많이 남기며(much to be desired)”, "아무런 소용이 없을 터(would serve no good purpose)", "우리가 유념해야 할 고려(a consideration which we should do well to bear)"같은 어구들은 항상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있을 아스피린 꾸러미 같은 지속적 유혹이다. 이 에세이를 통해 돌이켜 보면, 분명 당신은 내가 반복해서 내가 반대하고 있는 바로 그 잘못들을 범했다는 걸 발견할 것이다. 오늘 아침 신문으로 나는 독일의 상황을 다룬 팜플렛을 받았다. 작자는 내게 말하길 그가 ‘그걸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단다(felt impelled to write it).’ 나는 그걸 아무데나(randomly) 열어봤는데, 여기 내가 본 바로 첫 문장이 있다. “(연합군은) 독일의 민족주의적 반동(反動)을 피할 그런 방법으로 독일의 사회적, 정치적 구조에 대한 급격한 변화를 이뤄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공조적(共助的, co-operative)이고 연합된 유럽의 기초를 놓을 기회를 갖고 있다.” 당신들도 보다시피, 그는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지만, (아마도 뭔가 그가 새롭게 말할 뭔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그의 단어들은 마치 기병대의 말들이 전장(戰場)의 나팔소리에 응답하듯, 그들을 자동적으로 친숙하고도 끔찍한 패턴으로 묶어버린다. 기성(旣成, ready-made)의 어구들로 사람의 마음에 침입하는 것은 단지 그 사람이 그들을 계속해서 경계함으로써만 막을 수 있으며, 모든 그런 어구들은 그의 뇌의 일부를 마비시켜버린다.
나는 앞서 말하길, 우리 언어의 타락이 아마 치유될 수 있으리라 했다. 이걸 부인하는 이들은 - 만약 그들이 주장을 하기나 한다면 말인데 - 언어란 단지 기존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할 뿐이며, 우리가 단어들과 구문들로 직접 때워봤자(tinkering) 그 발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일반적인 언어의 어조(tone)와 정신(spirit) 상에선 이게 사실일 수 있으나, 세부적으론 그렇지 아니하다. 실없는 단어들과 표현들이 종종 사라졌는데, 어떤 진화적인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소수의 의식적인 행동에 의하여 그렇게 됐다. 최근의 두 사례가 ‘모든 거리를 다니고, 모든 돌들을 헤집어놨는데(그렇게나 보편적으로 쓰였는데)’ 어느 몇몇 언론인들의 조소(嘲笑, 비웃음)로 사라져버렸다. (썩어서) 파리가 꼬일만한 메타포들의 길다란 리스트가 있는데, 만약 충분한 사람들이 그들의 직업에서 스스로 흥미를 갖는다면야, 이는 유사하게 제거될 수 있다. 그리고 “아닌게 아니~(not un~)”라는 구성도 비웃어 제거시키는 것도(♢), 보통 문장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양을 줄이는 것도, 그리고 외래 어구들과 여기저기를 배회하는 과학적 단어들을 몰아내는 것도, 그리고 일반적으로, 허세 부림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자잘한 것들이다. 영어를 지키는 것은 이것 이상을 내포하는데, (일단) 그게 내포하지 않는 것을 말함으로써 시작하는 게 아마 가장 나을 것이다.
(♢) "아닌게 아니(not un~)" 구성은 이 문장을 외움으로써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 “검지아니한 게 아닌 개가 작지 아니한 게 아닌 토끼를 푸르지 않은 게 아닌 들을 가로질러 쫓는다.” (A not unblack dog was chasing a not unsmall rabbit across a not ungreen field.)
무엇보다, 그것은 [옛 말투]와, [사라진 단어와 연설의 어투를 지키는 것]과, 절대로 시작되어서는 안 될 [“표준 영어”를 규정(set up)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반면에 그것은 효용이 다한 모든 단어와 숙어들을 긁어내는데 특히나 관계가 있다. 자기가 의미하는 바를 명확하게 하기만 하면 전혀 중요치 않을 정확한 문법이나 통사론과도 관계가 없으며, 미국식 영어(Americanism)를 피하는 것과도, 또는 “좋은 산문 스타일”이라 불리는 것을 갖는 것과도 관계가 없다. 반면에 가짜 단순성(fake simplicity), 그리고 문어(文語)를 구어적으로 만들려는 시도와도 관계가 없다. 또한 그것은 모든 사례에서 색슨 단어를 라틴 단어에 우선시킴을 내포하지도 않는다. 비록 그것이 화자의 의도를 감당(cover)할 적고 짧은 단어들을 쓰는 것을 의미하긴 하지만 말이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의미가 단어를 선택토록 하는 것이지 다른 게 아니다. 산문에서 작자가 할 수 있는 단어로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짓은 그 단어에 굴복하는 것이다. 당신이 뭔가 구체적인 물체를 생각할 때, 당신은 (그 물체를 지칭하는)말 없이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만약 당신이 떠올린 것을 묘사하길 원한다면 아마도 적합해 보이는 정확한 단어를 찾을 때 까지 헤매야(hunt about) 할 것이다. 뭔가 추상적인 걸 생각할 땐, 당신은 더욱 처음부터 단어를 찾으려 들텐데, 당신이 이를 막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기존의 방언이 난입해 들어와 당신을 위해 그 일을 해 줄 터다. 당신의 의도를 흐릿하게 하거나 심지어 바꿔버리는 대가로 말이다. 아마도 되도록 단어를 사용하는 걸 미뤄두고, 묘사와 감동으로 작자(作者)의 의도를 할 수 있는 한 명확하게 획득하는 게 나을 터다. 그 후에 작자는 의도를 가장 잘 감당(cover)할 어구를 - 단순히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 선택할 수 있으며, 그런 후에 작자의 단어들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인상을 줄지를 바꾸거나, 선택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의 마지막 노력은 케케묵었거나 뒤죽박죽 된 모든 이미지들을, 미리 조립된 모든 어구들을, 쓸모없는 반복을, 그리고 실없는 소리들과 모호함들을 일반적으로 잘라 버린다. 그러나 작자는 종종 한 단어 혹은 한 어구의 효과에 대해 의심할 수 있으며, 본능이 굴복할 때 의지할 수 있는 규칙들이 필요하다. 나는 다음의 규칙들이 대부분의 사례들에 해당되리라(cover) 생각한다.
(i) 당신이 인쇄 매체에서 으레 봐왔을 메타포(은유), 직유, 또는 다른 언어의 비유적 표현들을 절대 쓰지 마라.
(ii) 짧은 단어면 될 곳에 긴 단어를 절대 쓰지 마라.
(iii) 단어를 잘라버릴 수 있으면, 항상 잘라 버려라.
(iv) 능동태를 쓸 수 있을 땐 절대 수동태를 쓰지 마라.
(v) 일상의 영어에서 그에 해당하는 걸 생각해낼 수 있다면, 외래어구나, 과학적 단어, 혹은 은어를 절대 쓰지 마라
(vi) 뭔가 야만적인 것을 대놓고 말하는 것 보다 빨리 이 규칙들 중에 뭔가를 어겨라. (즉 이 규칙을 어기고 나서 영어를 오염시킬 나쁜 것을 말하도록 하라)
이 규칙들은 기초적으로 들리며, (실제) 그러하지만, 현재 유행하는 스타일로 글을 쓰는데 익숙해지게 된 모든 이들의 태도에 깊이 있는 변화를 요구한다. 누구든 이 모든 규칙들을 지키면서도, 여전히 나쁜 영어를 쓸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는 이 글의 서두의 다섯 사례에서 인용한 부류의 글은 쓰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언어의 문학적 사용은 다루지 아니하고, 사상을 덮어 버리거나 막아버리는 수단이 아닌, 단지 표현의 수단으로서의 언어를 고찰했다. 스튜어트 체이스와 다른 이들은 모든 추상 단어들이 의미 없다고 주장하는데 근접했으며, 이것을 일종의 정치적 무저항주의(quietism)을 옹호하는 전제로 이용해왔다. 당신이 뭐가 파시즘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파시즘에 저항할 수 있는가? 누구든 그런 불합리함들을 이렇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현재의 정치적 혼돈은 언어의 부패와 연결되어있음을, 그리고 누구든 언어적 목적에서 시작함으로써 약간의 진전을 아마도 가져올 수 있으리란 점을 인식해야한다. 당신의 영어를 단순화시키면, 당신은 ‘정통’의 가장 나쁜 우매함들에서 자유로워진다. 당신은 필요한 방언들의 어느 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고, 바보 같은 말을 할 때는, 그 어리석음이 심지어 당신 자신에게도 명백할 것이다. 정치적 언어는 - 보수당에서 무정부주의자들에 이르는 모든 정당들에 있어 다채롭긴 하지만 이는 사실인데 - 거짓말을 진실되게, 살인을 존경스럽게 들리게 하며, 한 줄기 바람(風, pure wind)에 실체적 외양(appearance of solidity)를 준다.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바꿀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각자 나름의 버릇은 바꿀 수 있으며, 종종 심지어, 충분히 크게 비웃기만 한다면, 몇몇 닳아빠지고 쓸모없는 어구들 - 군홧발(jackboot), 아킬레스 건(Achilles' heel), 후끈 달아오른 곳(hotbed), 용광로(melting pot), 사상검증(acid test), 생지옥(veritable inferno) 따위나, 다른 언어적 쓰레기 덩어리 -을 그게 속하는 쓰레기통으로 보내버릴 수 있다.
♤ 본 번역문은 Sior(블로그인)의 공개 의뢰(2008년 3월 30일)에 테라포밍(블로그인)이 응하여 이뤄진 것(2008년 4월 4일)으로, 본문 및 이에서 비롯된 2차 저작물의 상업적 이용(예 : 인터넷 지식시장 판매)만을 금지하고, 그 외 어떤 목적으로도 사용을 허가합니다. 더욱 완벽한 번역문을 만드실 분들의 본 자료 이용을 환영합니다. 단, 출처는 밝혀주시고, 수정할 바를 발견하시면, 출처에 답글로, 혹은 메일로 개선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본 번역문은 직역과 의역이 혼재되어 있으며, 적절한 우리말을 찾기 위해 무리한 부분이 많습니다. 이용하시는 분들의 조언을 기대합니다.
♤ 원문을 참조하는 것이 바람직한 부분, 무리해서 의역한 부분, 그리고 우리 말의 구조상 부가해서 읽으면 좋을 부분들은 ( 괄호 ) 로 표기하였습니다.
# by | 2008/04/04 01:13 | 미국정치 | 트랙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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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정치와 영어'를 우리말로 옮기고
번역 - 조지 오웰, "정치와 영어"(1946)[글의 주제]생각 좀 하고 글을 써라. 단순하고 깔끔한 말로 독자의 이해를 돕는데 주력하라. 으레 쓰이는 말이라고 꾸역꾸역 구겨 담아봤자 뭔 말인지 알 수 없게 될 뿐이다. 어려운 말 아무리 많이 써봤자, 뜻도 제대로 모르고 쓰는, 순전히 허세이며, 영어를 더욱 망칠 뿐이다. 이렇게 썩어버린 말을 계속 쓰면, 그 말이 우리 정신마저 썩게 만들 테니 경계해야 한다. 특히나 연설이나 선전-선동문 같은 ......more
제가 조지 오웰을 도메인으로 하는 블로그를 운영 중인데요, 그 동안 조지 오웰 얘기는 거의 안 했는데 이제 차근차근 해보려 합니다.
"어떤 목적으로도 사용을 허가"한다고 하셔서 소중히 제 블로그로 퍼가겠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다면 말씀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