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이야기

0. 요 몇 주간, 만사 제쳐놓고 반드시 가야하는 결혼식이 세 번 있었다. 내 인생에서 매우 강한 인상을 남긴 형(兄) 세 사람이 장가를 들었다. 하나는 군대 동기, 하나는 출신 과(科)의 터줏대감, 하나는 내 20대 중반의 정신적 지주였다.

참고로 맏이인 나는 형(兄)이라는 존재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형(兄)들에게 의지하려했고, 또 응대에 진심을 다했다. 비록 20대 중반에 그 중 둘(다시는 만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호되게 당한 후, 콤플렉스에서 졸업했다고 자평하지만, 이 세 사람은 내 인생에서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부디 그 의미가 변치 않길 바란다.

1. 군대 동기인 H모형이 결혼하기 한 주 전, 전화를 걸어왔다. 주말에 신림동 성당에서 혼인성사를 하니 ‘증인’이 되어달란다. 기쁜 마음으로 수락하고 전화를 끊는데,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았을 생각이 떠오른다. 결혼하는 거야 오래전부터 알고, 한 주 전엔 동기들끼리 모여서 축하연까지 했는데, 증인역을 성사에 겨우 사흘 앞두고 내게 부탁하나... 사실 H형은 경황이 없었다. 말 많고 탈 많은 [환경재단]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통화하면서 ‘압수할 때 누락된 자료 갖다 주러 검찰청에 갔다 왔다’는데 굳이 말이 필요 없었다. 그런 힘든 상황에서 나를 떠올리고 부탁을 했다는 것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에 나를 함께 하게 했다는 것에 감사했다.

* 참고로 ‘그 일’은 정권의 탄압이 아니라 진짜 횡령이었다.

정장이 없어서, 있는 옷 중에 격식 있어 보이는 것 빨아다 깨끗이 다려서 입고, 안 신어서 먼지가 앉은 가죽구두 닦아 신고 성당에 간다. 성사를 주관하는 신부님이 물으신다. “신부 측 증인이야 매주 보는 교인이니 됐고, 신랑 증인은 세례를 받은 교인입니까?” “군대에서 세례(아우구스티노)를 받았지만 성당에 안 나온 지 5년여 됐습니다.” “아니 저런 냉담중이시군요. 신부 증인은 완벽한데...고해를 하십시오.” 농담인줄 알았는데, 본당에 올라가 자리에 앉아있으니, 신부님이 미사 준비실 문을 열고 손짓하신다. 이젠 빼도 박도 할 수가 없다. 군대에서 날림으로 교리공부하고 받은 세례인데 고해성사에 대해서 뭘 알아야 하던지, 말던지 하지.

고해실로 들어가진 않았지만, 자줏빛 천을 두른 신부님과 마주앉아서, ‘격식 없이’ 마음에 응어리졌던 죄(罪)들을 토해냈는데... 이게 과연 고해성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신부님이 죄를 사하는 내용의 기도를 올리시고 ‘보속 없이’ 끝났다. ‘빠른 시일 안에 교리와 성사들에 대해서 공부하고 다시 고해를 하라’는 당부와 함께... 나와서 H형한테 말했다. “형을 위해서 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를 위해서 온 꼴이 됐어.” 그리고 성사는 간단히 끝났다. 교인들끼리 했다면 가족친지교인들 모두 모인 성대한 결혼식 그 자체였겠지만, 형이 종교가 없고, 신부 측 부모님도 안 오신 마당에 신랑-신부, 증인 둘, 신부님 이렇게 다섯 달랑 치른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그래도 로미오와 줄리엣 보다는 낫다고 하려나...

1주 뒤, 양가친지들이 모인 결혼식은 1) 주례가 없었고, 2) 사회자가 여성이었으며, 3) 신랑과 신부를 잘 아는 사람 둘이 축하인사를 하고, 4) 신부 아버지가 ‘눈물로 쓴’ 편지를 낭독했으며(먼저 온 동기가 식전에 그 편지를 쓰는 광경을 보고 알려 줌), 5) 축가를 초청가수와 신랑이 함께 부르는 등 ‘매우 독특하게’치러졌다. 형수 될 분이 주도하여 격식을 많이 깬 것 같았는데, 주례가 없는 이유를 ‘사회적 명망이 있다는 주례가 실제론 집안에서 폭력을 일삼는 등 전혀 결혼생활에 존경할만한 인물이 아닐 수 있어서’라고 설명한 것은 우리 또래엔 가장 깊게 울렸지만, 시골에서 올라온 나이든 하객들에겐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끄트머리에 신부가 하객들에게 드린 말씀은 ‘허식을 깨는 전투적 신여성’의 현대적 모습을 전형적으로 담고 있었다. 분위기 ‘싸~’해졌다고 생각한 순간, 우리 신랑 H형은 부드럽고 모두가 듣길 바랐을 말로 상황을 수습했다. 사실 그 때 신부는 신랑에 고마워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조화롭다’고 생각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에겐 ‘장 폴 사르트르’가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 같은 사람이 더 어울린다고 보니까. 묵묵히 보아주고, 들어주고,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집’같은 남자 말이다. H형은 예나 지금이나 딱 그런 사람이다.

2. 과(방)의 터줏대감, K형의 결혼식이 H형 결혼식 두 시간 뒤에 열렸다. 부랴부랴 식장으로 가면서 5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학번이 넷 위였던 K형은 사법고시생이었다. 일찌감치 졸업했거나, 군대에 갔거나, 아니면 연수원에 들어가 있었을 법도 했지만, K형은 내가 졸업하기 얼마 전에, 결국 막차를 타서 병사로 입대했다. 첫 휴가를 나왔을 때 그의 일성(一聲)은 이랬단다. “난, 이제 뭐든지 참을 수 있어!” 제대한 뒤에는 유명한 인터넷 쇼핑몰에 입사했고, 입사한지 4년쯤 지나 팀장이 되어 종횡무진 활약 중이다. 신부는 같은 직장에서 만났단다.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내 또래 과 사람들 모두는 K형을 ‘의리 있고 재미있고, 멋있고, 스케일이 큰 선배’라고 기억한다. 전공특성상 응집력이 가장 약한 과(...)라 다들 모래알처럼 떠돌았지만, 과 차원의 큰 행사가 있을 땐 항상 그 형이 있었고, 후배들을 다독이면서 분위기를 이끌었다. 과방의 너저분한 소파에 앉아 기타를 치고, 후배들과 함께 레인보우 식스(...)를 ‘떠들썩하게’ 즐기던 K형. 모두가 그 형을 좋아했다. 개인적으론 좀 거론하기 부끄럽지만 유쾌한 기억이 있고... 그러니 K형의 결혼식은 적어도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선후배, 동기들에겐 기꺼이 참석할 행사였다. 그리고 자연스레 일종의 과 졸업생모임이 됐다. 음... 솔직히 이것이 좀 걸렸다.

하버드 대학의 모 교수가 ‘마지막 강의’에서 이런 말을 당부했다지. “여러분. 동문회, 동창회란 데는 절대 가지 마라. 동기들과 자기를 견주는 와중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한 졸업한지 40년쯤 돼서 백발이 성성해지고 여생을 즐길 때가 되면 나가라.” 그래. K형의 결혼식에 사법고시, CPA를 패스한 선배들이 꽤 많이 왔고, 입법고시를 통과한 동기, 한국은행 입사한 동기도 왔고, 취업한 사람들은 대개 ‘고임금’의 금융권에 적을 두고 있었다. 초라해지고 조급해지는 나 자신을 느꼈다. 정신차리란 자극인 것인가, 후배들한테마저 뒤쳐졌으니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인가, 아니면 ‘소인기’해야 된다며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가.

그래. 이리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갔다. 안 간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있었겠나. 하릴없이 먹는 나이에 조급해하는 게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닌 마당에... 그저 ‘사람들 보러’ 가는 거지. 그리고 ‘만인의 형님’ K형 결혼식에 안간다면, 두고두고 아쉬워했을 게다.

3. 2주 뒤, 모(某) 집단 안에서 ‘교주’라 불리는 P형이 예술의 전당 근처, 모 웨딩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형은 ‘교주’라 불릴 정도로 ‘씨니컬한(냉소적인) 카리스마’가 충만한 사람이다. 딴지총수(김어준)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허례와 가식과 고정관념을 단칼에 잘라내는 즉답(卽答)을 내려줄 수 있을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래서 나는 이 형을 멘토(mentor)로 삼았다.

개인적으론 이 형에게 좀 많이 신세를 졌다. 2001년에 모 동호회의 부운영자이던 내가 ‘쿠데타’에 동참할 때, P형더러 신임 운영자 후보로 나가라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몰아낸 당시 운영자는 내가 ‘형 콤플렉스’를 졸업하는데 기여한,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두 사람 중 하나다.) P형은 내가 부운영자로 계속 일해야 선거에 나서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수락은 했어도 ‘배신자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나’라면서 아무것도 안했기 때문에...

P형은 오래 전에 여자에 초탈해질 ‘모종의 사건’을 겪고 나서 아예 ‘결혼 따위’에선 관심을 껐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 좀 소개시켜줄려고 해도 ‘나만 좋아할 여자 아니면 말도 꺼내지 마라’며 방어막을 쳤다. “찬탄할 정도로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라면(기껏해야 천명에 하나 둘 정도다), 여자가 하는 시답잖은 얘기는 들어주지 마라. 끌려 다니면서 에너지 낭비할 필요 없다. ‘내(오빠)가 맞다’며 단칼에 끊고 무조건 자기방식으로 끌고 다녀라.”라는 게 이 형의 지론이었다.

그런 사람이 갑작스레 장가를 든다는 것은? ‘정말로 자기만 좋아하는 여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동창인데, 캐나다에 이민 갔다가 오랜만에 귀국해서 옛날 친구들 만나던 차에 ‘한눈에 꽂힌 거다.’ 연애 얘기를 들어 알고 있는 모임의 대모(大母)가 말한다. “신부가 교주를 너무너무 좋아한단다.” 그러니 갈 수 밖에. “뭐, 나도 용가리통뼈는 아니다.” 축하메시지에 대한 P형의 겸연쩍은 답신이었다.

신혼부부를 공항에 데려다 줄 L형과 얘기했다. “내가 지난주에 엄친아(‘엄마친구아들’의 줄임말. 자기 욕심에 못 미치는 자식을 닦달할 때 쓰는 모친들의 관용어) 결혼식을 다녀왔어. 그 어머니란 사람도 굉장하지. 아들한테 2억 주고 ‘네가 알아서 해라’그랬단다. 축의금은 두당 얼마씩 내는지는 내 소관이 아니니까(부모님 소관) 모르겠어. (내가 P형 결혼식장이 코스요리 식사를 함께 할 수 있게 돼있는 곳임을 얘기하자) 아까 얘기한 엄친아가 결혼한 호텔은 두당 15만원짜리 식사를 낸다더라. 그런데 그게 맛있을 리가 없지. 전채로 나온 게 러시아산 크랩이라는데 뭐 그게 그렇게 특별한지도 모르겠고... 게다가 한꺼번에 200인분 가까운 스테이크를 내야 하는데 맛이 있겠냐? 뭘 씹는 건지 모르겠더라. 오늘 P형 결혼식도 그다지 기대하진 말라구. 차라리 마음편히 먹을 수 있고, 그때그때 채워주는 보통 결혼식 뷔페가 더 낫다.”

나는 받아서 말했다. “엄친아가 생기려면 그에 걸맞은 엄마가 먼저 있어야 하는구만. ‘엄친아’를 입에 올리는 어머니들이 조롱거리가 되는 게 당연해. 엄친아로 자식을 키우고 싶으면 먼저 자기가 잘나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리고 2억으로 돈지랄하는데 두당 15만원이 뭐냐... 쩨쩨하게... 기껏 호텔 결혼식이라니... 그 사람들 상상력도 별거 아니구만.”

* 이 글을 쓰는 사람. 결혼식에 2억쓸 졸부도 아니고, 그런 사람들의 세상, 꿈도 못꾼다.
* 예상대로 예식장 식사 수준은 그다지 바랄 게 못됐다. 계룡대 무궁화회관보다도 못했다.

너무 좋아하는 가수 S씨가 신부와의 연으로 축가를 불렀다. 우와우와우와... 이럴 줄 알았으면 적극적으로 사인이라도 받고 사진이라도 찍는건데... 내가 이 가수 1집 앨범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지 않았던가!(주황색 바탕에 옛날 마이크 하나가 앨범 자켓) P형, 그리고 형수! 이것만으로도 감사해요! T_T

4. 언제할지 모르겠지만, 내 결혼식은... 1) 주례를 없애거나, 아니면 나와 아내가 존경하는 어른을 한 분씩 모셔다가 말씀을 청하고(주례가 둘 이상?), 2) 하객께 드릴 요리는 나와 아내가 직접 장만해서 올리고, 3) 축의금과 화환을 안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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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라포밍 | 2008/11/26 13:10 | 일상 | 트랙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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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테라포밍의 이글루 at 2009/03/10 16:49

제목 : H형 결혼식이 한겨레 신문에 나오다
결혼식 이야기오늘자 한겨레 신문에 위 글에서 얘기했던 H형의 결혼식 기사가 실렸습니다.(작년 11월인데!) [주례없고...착하고... 이런 결혼식 어때요?] (클릭) (한겨레신문 2009년 3월 10일)H형이 보낸 문자 메세지론 '블로그에 쓴 글을 보고 형 결혼식이 신문에 날것 같다...'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 결혼식이 기자의 눈에 들었을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네요. 근데... 형수가 그 포스트 보면 그닥 좋게 생각하지......more

Commented by 림rym at 2008/11/26 20:28
결혼이라 ..흥성흥성한 느낌이네요 :) 사회생활의 느낌도 많이 묻어나지만 ^^:
제게는 아직 먼 이야기지만 :) 어찌되었던 결혼이란 건 , 멋진거죠 .
... 하지만 요리를 직접 장만하려면 두분 꽤 고생하실듯 싶습니다 ;;
Commented by 테라포밍 at 2008/11/27 13:57
주제의식 간파해주세요. 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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